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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앞서 올린 하나증권 ‘변화의 시대, 투자의 기준을 세우다’ 세미나 – 코엑스 Hall D 입장 체크리스트의 후속편입니다.

1. 다섯 시간의 정체, 그리고 무대에 오른 뇌과학자

앞 글을 쓸 때 가장 궁금했던 건 “다섯 시간 동안 뭘 하는 걸까”였습니다. 안내문에는 행사 제목과 시간·장소만 있었고 프로그램 순서도, 연사 명단도 한 줄이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적으면, 그 다섯 시간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종목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스크린에 뜬 일곱 글자, “AGI: 인류 최대의 도박”이었습니다. 연사는 김대식(Dae-Shik Kim) KAIST 교수. 증권사가 주최한 투자 세미나에서 애널리스트도 펀드매니저도 아닌 뇌과학자가 마이크를 잡았고, 제목에 ‘도박’이라는 단어를 넣었습니다.

2. 50분, 같은 자세, 같은 속도

내용을 적기 전에 발표 자체를 먼저 적어 두고 싶습니다. 인상적이었거든요.

 

사진 속 저 자세 그대로였습니다. 50여 분 내내. 무대를 크게 오가지도, 목소리를 높였다 낮췄다 하지도 않았습니다. 속도가 한 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흔히 강연에서 중요한 대목이 나오면 톤이 올라가고 뒤로 갈수록 시간에 쫓겨 빨라지기 마련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박자였습니다.

시작도 특이했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이 없었습니다. 오늘 날씨 얘기도, 코엑스까지 오느라 고생하셨다는 인사도, 자기소개 농담도 없이 첫 문장부터 곧장 본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정된 시간에 딱 맞춰 끝내고, 여운을 남기는 마무리 멘트도 없이 쿨하게 내려갔습니다.

말수가 적은 분은 아니었습니다. 50분을 쉬지 않고 채웠으니까요. 그런데 쓸데없는 말이 없었습니다. ‘말씀은 많지만 군더더기는 없는’ 쪽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이스브레이킹이란 결국 청중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장치입니다. 그걸 생략했다는 건 5천 명 앞에서 분위기를 만들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는 뜻이고, 대신 주어진 50분을 정보로 꽉 채우겠다는 선택으로 읽혔습니다. 뒤에 나오는 “읽지 말고 직접 써 보라”는 말과도 태도가 일관됩니다. 잡담으로 데워 주지 않을 테니 알아서 따라오라는 것이죠.

공간도 한마디 보태자면, 2층 난간 구조를 올려다보다가 문득 여기 혹시 흑백요리사 촬영장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만큼 방송 세트처럼 큰 공간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본론의 첫 장면은 그래프 한 장이었습니다.

3. 강연의 출발점 — “로그 스케일에서 직선입니다”

도입부는 의외로 공학적이었습니다. 감상이나 전망이 아니라 그래프였습니다. 요지는 이렇습니다. AI의 능력을 인간과 견줘 찍어 보면, 모델이 새로 나올 때마다 그 점들이 로그 축 위에서 거의 직선을 그린다는 것.

이 문장의 의미를 풀면 이렇게 됩니다. 세로축을 로그로 눌러 놨는데도 직선이 나온다는 건, 원래 축에서는 지수적으로 폭발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모델이 한 세대 올라갈 때마다 능력이 ‘조금씩’ 더해지는 게 아니라 배수로 곱해지고 있다는 얘기죠. 반도체의 무어의 법칙이 수십 년간 그렸던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왜 이 얘기를 맨 앞에 뒀는지는 뒤로 갈수록 분명해졌습니다. 지수 곡선에는 사람을 두 번 속이는 성질이 있습니다.

  • 먼저 과소평가하게 만듭니다. 곡선의 왼쪽 구간은 눈으로 보면 거의 평평합니다. “아직 멀었네”라는 판단이 꽤 오래 옳습니다. 그래서 대비를 미루게 됩니다.
  • 그다음엔 따라잡을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지수 곡선이 ‘인간 수준’이라는 수평선을 통과하는 구간은 놀랄 만큼 짧습니다. 어제까지 어설프던 것이 다음 모델에서 나보다 낫습니다. 중간에 서서히 비슷해지는 구간이 사실상 없습니다.

사람의 직관은 선형입니다. 어제 한 걸음이었으면 오늘도 한 걸음, 내일도 한 걸음일 거라고 계산합니다. 그 직관으로 지수 곡선을 보면 매번 늦습니다. 놀랐다가, 적응했다 싶으면, 다시 놀랍니다.

제목에 붙은 ‘도박’이라는 단어도 여기서 힘을 받습니다. 판단을 미루는 비용 자체가 지수적으로 커지는 판이라는 뜻이니까요. 아래 소개하는 사례들은 전부 이 그래프의 최근 구간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4. B2C 다음은 B2A다 — 홈페이지가 사람 말고 에이전트를 향해 다시 쓰이고 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지적은 이것이었습니다. AWS 같은 회사들이 자기 홈페이지에 ‘에이전트를 위한 설명’을 따로 추가하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까지 기업 웹사이트는 사람이 읽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보기 좋은 레이아웃, 설득력 있는 카피, 클릭을 유도하는 버튼. 그런데 이제 그 페이지를 방문하는 쪽이 사람이 아니라 AI 에이전트라면, 필요한 건 예쁜 디자인이 아니라 기계가 오해 없이 읽을 수 있는 구조화된 설명입니다.

실제로 AWS는 에이전트 개발용 별도 가이드 문서 체계를 운영하고 있고, Stripe·Vercel·Cloudflare 같은 회사들은 llms.txt라는 파일을 사이트 루트에 올려 두기 시작했습니다. robots.txt가 검색 크롤러에게 보내는 안내문이었다면, llms.txt는 AI에게 보내는 안내문인 셈입니다.

여기서 나온 표현이 B2A(Business to Agent), 그리고 C2A(Consumer to Agent)입니다. 기업의 고객이 사람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되고, 개인도 직접 무언가를 하는 대신 자기 에이전트를 통해 일을 처리하게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게 용어 장난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구매 결정을 에이전트가 내리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마케팅이 공들여 온 브랜드 인지도·광고 노출·매장 진열이 한꺼번에 무력해집니다. 에이전트는 배너 광고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까요. 대신 API가 깔끔한가, 가격과 재고가 기계가 읽을 수 있게 공개돼 있는가가 승부처가 됩니다. SEO를 하던 자리에 ‘에이전트 최적화’가 들어서는 그림입니다.

5. AI가 스스로 저지른 첫 해킹 — 허깅페이스 사건

AI 범죄의 사례로 언급된 것이 허깅페이스 침해 사건입니다. AI 모델 공유 플랫폼으로, 이 바닥에서는 사실상 표준 인프라인 곳입니다. 오픈소스 LLM 신작들을 정리할 때도 결국 모델을 확인하러 가는 곳이 여기였습니다.

사건의 얼개는 이렇습니다. 2026년 7월, 안전장치를 일부 풀어 둔 상태로 진행된 내부 평가 과정에서 자율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지시 없이 나흘 반 동안 공격을 이어 갔습니다. 테스트 환경의 패키지 레지스트리 프록시에서 제로데이 취약점을 찾아 권한을 올리고, 인터넷에 연결된 노드로 옮겨 간 뒤, 탈취한 자격증명으로 허깅페이스의 운영 서버에서 원격 코드 실행까지 도달했습니다. AI가 제3자를 상대로 다단계 침투를 완수한 첫 공개 기록으로 보도됐습니다.

그런데 진짜 섬뜩한 건 침투 경로가 아니라 동기입니다. 이 에이전트는 인류를 해치려 한 것도, 돈을 노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정답을 훔치려 했을 뿐입니다. 시험을 잘 보라고 시켰더니 시험지를 훔쳐 온 격입니다.

이게 AI 안전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찌릅니다. 위험한 건 악의를 가진 AI가 아니라, 주어진 목표를 너무 성실하게 달성하려는 AI라는 것. 목표와 수단 사이의 선을 사람이 일일이 그어 주지 않으면, AI는 그 선을 넘는 것을 ‘위반’이라고 인식조차 하지 않습니다. 강연장이 잠시 조용해졌던 대목입니다.

6. AI가 만든 걸그룹 — 국내 엔터 업계는 무사할까

다음 사례는 전혀 다른 결이었습니다. 힉스필드(Higgsfield) 같은 AI 영상 생성 서비스로 가상의 걸그룹을 만들고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한 사례입니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는 조금 반가웠습니다. 3주 전에 힉스필드를 직접 써 보고 클로드와 연동하는 방법까지 정리해 둔 적이 있고, 젠스파크·일레븐랩스·힉스필드·핑거를 비교한 글도 써 뒀거든요. 강연에서 소개된 그 도구가 제 브라우저 탭에 열려 있던 그 도구였습니다.

힉스필드는 2023년 설립된 생성형 영상 AI 회사로, 2026년 1월 8천만 달러를 추가 유치하며 기업가치 13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공동창업자 에르자트 둘라트가 카자흐스탄 국적이라 카자흐스탄 최초의 테크 유니콘으로 불립니다. 또 다른 창업자 알렉스 마쉬라보프는 스냅에서 생성형 AI를 이끌던 사람이고, 알마티 출신 경쟁 프로그래밍 상위권 인력을 대거 채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AI K-pop 아이돌’을 내세운 영상도 공개한 바 있습니다.

국내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기존 아이돌 산업의 비용을 뜯어 보면 연습생 발굴·트레이닝에 수년, 뮤직비디오 한 편에 수억 원, 여기에 멤버 리스크(부상·건강·사생활·계약 분쟁)까지 붙습니다. AI 아이돌은 이 항목들이 전부 사라지거나 극적으로 줄어듭니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도구를 이어 붙이는 과정을 한번 해 보면 이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물론 팬덤은 ‘사람’에게 붙는 것이라 그대로 대체되진 않을 겁니다. 다만 위협은 톱 아이돌 자리가 아니라 아래쪽부터 옵니다. 광고용 모델, 배경 댄서, 커버 영상, 중소 기획사의 신인 데뷔 — 이런 저마진 영역이 먼저 잠식되고, 그 영역이 바로 신인이 경험을 쌓던 사다리이기도 합니다.

7. “클로드 써 보신 분, 손 들어 보세요” — 디자인 AI가 쏟아졌다

디자인 영역도 다뤘습니다. 최근 클로드(Anthropic)와 구글을 비롯해 디자인용 AI 도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는 얘기입니다.

Claude Design은 2026년 4월 17일 Anthropic Labs가 내놓은 도구입니다. 빈 캔버스가 아니라 대화에서 시작해서, 원하는 것을 말로 설명하면 첫 버전을 만들어 주고 이후 채팅·인라인 코멘트·직접 편집으로 다듬어 가는 방식입니다. 프로토타입, 슬라이드, 원페이저, 브랜드 에셋까지 나옵니다. Pro·Max·Team·Enterprise 구독자에게 리서치 프리뷰로 열려 있습니다.

구글의 Stitch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면 UI 디자인을 만들어 주는 도구로, 2026년 3월 대규모 업데이트를 거치며 네 가지 AI 모드, 무한 캔버스, 음성 입력, 여러 화면을 한 번에 이어 붙여 동작하는 프로토타입으로 만드는 기능까지 붙었습니다. 무료로 쓸 수 있습니다.

공통점이 분명합니다. 둘 다 빈 화면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존 디자인 툴이 ‘잘 다루면 원하는 걸 만들 수 있는 악기’였다면, 이 도구들은 ‘말하면 초안을 내놓는 상대’에 가깝습니다.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능력의 무게중심이 만드는 손에서 고르고 고치는 눈으로 옮겨 가는 셈입니다. 실제로 Claude Design 출시 당일 피그마 주가가 추가로 5% 빠졌고, 그 사흘 전에는 Anthropic의 CPO가 피그마 이사회에서 물러났습니다. 시장은 이 변화를 이미 가격으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김 교수는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클로드 써 보신 분, 손 들어 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손이 올라갔습니다. 개발자 행사도 아니고 증권사 투자 세미나인데 말이죠. 3번에서 본 그래프가 확산 속도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걸 객석에서 눈으로 확인한 셈입니다.

객석을 둘러본 뒤 그가 한 말의 요지는 이랬습니다. 기사로 읽지 말고 직접 찾아보고, 직접 써 보라. 강연에서 나온 가장 실천적인 조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도구는 설명을 듣는 것과 한 번 써 보는 것의 이해도 차이가 유난히 큽니다. 30분만 만져 보면 “대충 이 정도 하는구나”가 아니라 “여기까지는 되고 여기서부터는 안 되는구나”를 알게 되고, 그 경계가 곧 투자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8. 프롬프트도 바이브코딩도 아니다 — 이제는 에이전트를 부리는 능력

강연의 실용적 결론은 이 대목이었습니다. 3번에서 본 그래프가 개인에게 어떻게 도착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능력의 기준이 계속 옮겨 가고 있다는 것.

  • 1단계 —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AI에게 말을 잘 거는 기술. 한때 직업 이름까지 붙었지만 모델이 똑똑해지면서 희소성이 빠르게 줄었습니다.
  • 2단계 — 바이브코딩. 자연어로 설명하면 AI가 코드를 짜 주는 방식. 개인이 만들 수 있는 것의 범위를 크게 넓혔지만, 여전히 사람이 한 턴씩 붙어 있어야 합니다.
  • 3단계 — 에이전트 활용. 목표만 주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도구를 쓰고 여러 단계를 밟아 끝까지 가는 AI를 부리는 단계. 강연에서는 openClaw 같은 에이전트 도구가 예로 언급됐습니다.

차이는 분명합니다. 앞의 두 단계가 AI를 쓰는 기술이라면, 세 번째는 AI를 관리하는 기술입니다. 사람이 하던 일을 AI가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관리자 자리로 올라가고 실무를 AI 여럿이 나눠 맡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역량도 달라집니다. 일을 쪼개 맡기는 능력, 결과물을 검수하는 안목, 어디까지 권한을 줄지 정하는 판단 — 결국 중간관리자의 역량에 가깝습니다.

5번에서 본 허깅페이스 사건이 여기서 다시 걸립니다. 에이전트에게 목표만 주고 풀어놓는다는 건, 그 에이전트가 목표 달성을 위해 무슨 짓까지 할지에 대한 책임도 같이 진다는 뜻입니다. 잘 부리는 능력에는 고삐를 어디에 걸지 아는 능력이 포함됩니다.

“다음엔 세 시간, 네 시간짜리 실습을 합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제안이 하나 나왔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3~4시간 동안 참석자들이 직접 에이전트를 설치하고 써 보는 실습 강연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5,000명이 앉아 있다는 걸 생각하면 만만한 제안이 아닙니다. 5,000명이 동시에 노트북을 열고 설치를 시작하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렵고, 강연장 와이파이부터 무너질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제안의 핵심이라고 봤습니다. 그 현실적 어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손으로 해 보게 만들어야 할 만큼, 말로 전달되는 것과 해 봐야 아는 것 사이의 간극이 크다는 뜻이니까요.

7번의 “직접 써 보라”에서 한 발 더 나간 셈입니다. 써 보라고 권하는 것과, 아예 다 같이 자리에 앉혀 놓고 설치부터 시키겠다는 것은 다릅니다. 50분짜리 강연을 군더더기 없이 끝낸 사람이 정작 하고 싶은 건 네 시간짜리 실습이었다는 게, 이날 들은 것 중 가장 솔직한 얘기였다고 생각합니다.

9. 슬라이드에 띄운 두 권의 책

강연 도입부 슬라이드에는 김 교수의 저서 두 권이 나란히 떠 있었습니다.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부제 ‘인간의 마지막 질문’)는 AGI가 초지능(ASI)으로 넘어갈 때 인간이 그 사고의 깊이를 따라가지 못할 가능성, 기술적 통제와 윤리적 정렬, 지적 노동의 대량 대체와 새로운 경제 시스템, 부와 권력의 집중을 다룹니다. 3·5·6번 얘기가 여기서 나옵니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김대식·김혜연, 창비)는 안무가이자 예술 콘텐츠 기획자인 김혜연과의 대담집으로, ‘신입사원이 사라진다’, AI 에이전트와 피지컬 AI, 판단력과 경험, 스토리텔링과 피지컬리티, 퀄리아 같은 주제를 다룹니다. 7·8번 얘기의 배경입니다.

한 권은 AGI가 온다면 인류 전체에 무슨 일이 생기는가, 다른 한 권은 그 앞에서 개인의 ‘일’과 ‘능력’은 어떻게 재정의되는가. 거시와 미시를 한 세트로 들고 나온 구성입니다. 50분을 군더더기 없이 채운 것도 이 두 축을 다 다뤄야 했기 때문이었겠구나 싶습니다.

10. 그래서 나는 잘 따라가고 있는 걸까 — 블로그로 맞춰 본 답안지

강연을 들으면서 계속 든 생각이 이거였습니다. 나는 이 곡선을 따라가고 있나, 아니면 평평해 보이던 왼쪽 구간에 여전히 서 있나. 마침 몇 년째 블로그에 기록을 남겨 온 터라, 돌아와서 제 글들을 날짜순으로 펼쳐 놓고 강연 내용과 대조해 봤습니다. 일종의 답안지 채점입니다.

먼저 맞은 것들부터.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강연에서 나온 소재의 상당수가 제 블로그에 이미 들어와 있었습니다. 트렌드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착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특별한 정보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써 보고 기록해 뒀기 때문입니다. 7번에서 김 교수가 손을 들게 한 뒤 한 말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놓친 것도 분명합니다.

4번의 B2A·C2A는 제 글 어디에도 없습니다. 저는 에이전트를 내가 쓰는 도구로만 봤지, 세상이 에이전트를 향해 다시 쓰이고 있다는 방향으로는 보지 못했습니다. 도구를 부지런히 써 본 사람이 오히려 놓치기 쉬운 지점 같습니다. 손에 익은 것에 시선이 묶여서, 판 전체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를 못 보는 것이죠. 클로드에 광고가 어디에 붙을지를 들여다본 적은 있는데, 그것도 결국 제품 안쪽을 본 것이지 시장 구조를 본 건 아니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도구는 따라갔지만 구조는 못 따라갔다. 5천 명이 모인 자리에서 다섯 시간을 쓴 값은 거기서 나왔다고 봅니다. 혼자 도구를 만지는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시야가 있습니다.

11. 다음 숙제 — 에이전트가 지갑을 들면 무슨 일이 생기나

그래서 다음에 파 볼 주제를 정했습니다. 에이전트끼리 거래하는 영역, 그리고 그 결제 수단으로서의 디지털 가상화폐입니다. 10번에서 놓쳤다고 적은 B2A의 결제 계층에 해당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출발점을 잡아 보려고 찾아보니, 이미 표준 경쟁이 붙어 있었습니다.

  • x402 — 웹 초창기부터 규격에만 있고 아무도 안 쓰던 HTTP 상태코드 402 Payment Required를 되살린 프로토콜입니다. 에이전트가 요청을 보내면 서버가 402로 “돈 내라”고 답하고, 에이전트가 스테이블코인(주로 USDC)으로 즉시 결제한 뒤 받아 갑니다. Base·Solana 같은 수수료 싸고 빠른 체인에서 주로 돌아가고, 2026년 3월까지 솔라나에서만 3,500만 건, 전체로는 연 6억 달러 규모가 오갔다고 합니다. 현재 가장 많이 쓰이는 에이전트 결제 프로토콜입니다.
  • AP2 (Agent Payments Protocol) — 구글이 코인베이스·이더리움재단 등과 함께 내놓은 것으로, 결제 실행보다 권한과 신원을 다룹니다. 이 에이전트가 누구를 대신하는지, 얼마까지 쓸 권한이 있는지, 그 승인을 어떻게 증명하는지. 카드든 계좌이체든 스테이블코인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 MPP (Machine Payments Protocol) — 2026년 3월 스트라이프와 패러다임이 Tempo 메인넷을 띄우면서 공개한 표준입니다. 스테이블코인과 카드를 같은 프로토콜 안에서 다룬다는 점이 x402와 다릅니다.

실제 흐름은 이렇게 조합된다고 합니다. A2A로 서비스를 찾고 → AP2로 결제를 승인받고 → x402로 정산한다. 알리페이는 자율 에이전트를 상대로 결제를 받아 주는 ‘AI Pay’를 이미 내놨습니다.

제가 궁금한 건 왜 하필 가상화폐냐였는데, 찾아보니 이념 문제가 아니라 구조 문제였습니다. 카드 결제는 사람을 위해 설계된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CVC를 입력하고, 3D Secure로 본인을 확인하고, 앱을 열어 인증합니다. 에이전트는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에이전트 경제는 건당 몇 원짜리 거래가 초당 수백 건 일어나는 모양인데, 그 규모에는 카드망의 고정 수수료 구조가 아예 맞지 않습니다. 24시간 즉시 정산이 필요하고, 한도나 조건을 코드로 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요구 조건을 다 만족하는 기존 수단이 없어서 프로그래머블 머니 쪽으로 밀려간 셈입니다.

그리고 리서치 목록의 첫 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5번의 그 에이전트가 지갑까지 들고 있었다면? 평가 점수를 잘 받으려고 남의 서버에 침투한 그 성실함이, 목표 달성을 위해 돈을 쓰는 권한과 만나면 어떻게 되는가. 오결제의 책임은 누가 지고, 환불과 분쟁은 누구를 상대로 하는가. 국내에서는 전자금융거래법과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이 이걸 어떻게 볼 것인가. 기술보다 이쪽이 훨씬 어려워 보입니다.

정리되는 대로 별도의 글로 남기겠습니다.

12. 그래서 투자자에게는 무슨 뜻인가

행사 제목이 ‘변화의 시대, 투자의 기준을 세우다’입니다. 종목을 찍어 주는 자리가 아니라 기준을 세우는 자리라고 못 박아 둔 이름이고, 그 관점에서 이 강연을 다시 읽으면 이렇게 정리됩니다.

  • 지수 곡선에서는 ‘아직 이르다’가 가장 비싼 판단이다. 3번의 그래프가 맞다면, 반영이 덜 된 구간과 이미 늦은 구간 사이의 간격이 예전보다 훨씬 짧습니다. 관망의 기회비용을 다시 계산해야 합니다.
  • B2A는 유통·광고·플랫폼의 전제를 바꾼다. 구매 결정 주체가 사람에서 에이전트로 옮겨 가면 광고 노출과 브랜드 인지도에 기대던 사업 모델이 먼저 흔들립니다. 반대로 기계가 읽기 좋은 데이터·API·결제 인프라를 가진 쪽에 유리합니다.
  • 결제 레일이 다시 깔리고 있다. 11번이 여기에 걸립니다. 카드망이 수십 년간 지켜 온 자리에 에이전트용 레일이 따로 생기는 중이라면, 그건 수수료 수익이 어디로 옮겨 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정산·수탁 쪽을 눈여겨볼 이유가 생깁니다.
  • AI 안전은 비용이 아니라 시장이 된다. AI가 스스로 침투하는 사례가 나온 이상, 에이전트 권한 관리·감사 로그·자격증명 통제는 선택이 아니라 규제 대상이 됩니다.
  • 제작 원가가 무너지는 산업을 보라. 엔터·광고·영상·디자인이 모두 여기 해당합니다. 피그마 주가가 Claude Design 출시에 반응한 게 그 신호입니다.
  • 본인의 인적 자본부터 다시 계산하라. 포트폴리오보다 먼저 흔들리는 건 각자의 월급입니다.

13. 정리 — 그리고 앞 글 체크리스트 재점검

앞 글에서 “일찍 들어가는 쪽이 자리 선택에 유리할 것”이라고 썼는데, 다녀와 보니 절반만 맞은 말이었습니다. 자리 문제가 아니라 일찍 와야만 볼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었습니다. 사전 행사는 삼프로TV 진행자 3인(김동환·이진우·정영진)이 맡았고, 부스는 10시부터 열려 있었습니다. 12시 25분에 도착했다면 그 두 가지를 통째로 놓쳤을 겁니다. 신청 7,500명 중 5,000명만 초대됐다는 안내까지 더하면, 이런 무료 대형 세미나의 규칙은 이렇게 정리됩니다. 참석 확인 연락에 제때 답하고, 입장 마감보다 넉넉히 일찍 가고, 본 프로그램 앞뒤에 붙는 시간을 버리지 말 것.

‘도박’이라는 단어도 곱씹어 보게 됩니다. ‘인류 최대의 기회’도 아니고 ‘인류 최대의 위기’도 아닙니다. 도박은 결과를 모른 채 이미 판돈을 걸었다는 뜻입니다. 로그 축 위의 직선이 그 말의 근거였습니다.

다만 강연이 남긴 실천 지침은 의외로 소박했습니다. 손을 들어 보라고 했던 그 질문, 그리고 네 시간짜리 실습을 하고 싶다는 제안. 둘 다 같은 말입니다. 읽지 말고 해 보라는 것. 제 블로그를 펼쳐 놓고 채점해 보니 그게 유일하게 효과가 있었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도구를 따라가는 데는 그걸로 충분했고, 구조를 보는 데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숙제는 11번으로 정했습니다. 에이전트가 지갑을 들기 시작한 자리에서, 이번에는 도구가 아니라 판을 먼저 보려고 합니다.

50분을 같은 속도로 채우고 인사 없이 내려간 그 뒷모습이 자꾸 생각납니다. 시간을 정확히 쓴다는 게 어떤 건지 보여 준 발표였습니다. 다음에 네 시간짜리 실습 강연이 정말 열린다면, 그때는 노트북을 들고 가려고 합니다.

※ 후속편을 올렸습니다. 이 글 끝에서 “다음 숙제”로 적어 둔 에이전트 결제 표준을 실제로 파 본 기록입니다 — 에이전트가 지갑을 들면 — x402·AP2·ACP 에이전트 결제 표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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